4월 3, 2019

앙리 반 데 벨데의 베르크분트 극장

앙리 반 데 벨데, 벨기에, 1863. WerkBund Theatre, 1914. 철근 콘트리트 외, 소실. ©2019 VIZUS

4월 3일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석을 마련한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1957)’가 태어난 날입니다. 반 데 벨데는 미술공예운동의 윌리엄 모리스나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디자인사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깁니다.

앙리 반 데 벨데, 1908. Photo: Louis Held & Copy; Klassik Stiftung

반 데 벨데는 벨기에 제2의 도시 앤트워프(Antwerp)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이후 1년 동안 파리에서 프랑스 화가 카를로스 듀란(Carolus Duran 1837-1917)과도 교류하며 화가를 꿈꿉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인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에게 영감을 받아 점묘법 회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이후 단순한 선을 사용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도 매료됩니다.

반 데 벨데가 결정적으로 회화가 아닌, 건축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영국에서 시작한 미술공예운동의 이론을 접하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그러나 모리스가 기계 시대의 제품들을 경멸하고 중세 시대의 수공예 정신으로 복귀하기를 주장한 반면, 반 데 벨데를 비롯한 헤르만 무지테우스(Hermann Muthesius, 1861-1927),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가 속해 있던 독일공장연맹(Deutsh WerkBund)는 기계의 가치를 인정하고, 모든 제품과 건축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며 ‘디자인’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확장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1895년 벨기에로 잠시 돌아간 반 데 벨데는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신혼집 ‘블뢰멘베르프(Bloemenwerf)’을 지으며 건축가로서 새로운 시작합니다.

Bloemenwerf House (1896), 출처: 위키피디아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반 데 벨데가 1914년 독일공작연맹(베르크분트)이 쾰른 전시를 위해 제작한 ‘극장’입니다. 반 데 벨데가 주도했던 베르크분트 극장 건립 프로젝트는 그의 외국인 국적 때문에 논란이 있었으나, 이후 쾰른 시장의 지지와 동료들의 지원으로 반 데 벨데는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극장 모습,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1914년 7월 베르크분트 극장은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반 데 벨데는 이 극장에서 산업적 효용성과 단순성, 그리고 선의 미학을 표현합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제작하는 합리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보안 영역과 무대, 관객이 머무는 로비와 복도 등을 목적에 맞게 설계합니다. 무대는 기둥을 기준으로 3개로 나눠졌으나 이는 레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변적인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극장 시스템과 유사해보입니다. 객석은 평평한 직사각형 위에 의자를 놓고 계단식으로 구성하여 관람객의 시각을 확보합니다. 천장과 벽면의 직선은 무거운 지붕의 윤곽을 강조하는 동시에 아르누보 스타일 장식으로 예술적인 표현을 강조합니다. 반 데 벨데는 무대에서 연극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오롯이 작품을 표현하고 선보일 수 있는 유연하고도 총체적인 연극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극장이 설립되는 기간 동안 반 데 벨데는 책꽂이, 귀걸이, 드레스, 가구, 도자기, 식기류까지 디자인하며 활발히 활동합니다.

극장 도면,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복도,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무대 ,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객석,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입구,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로비, Theatre Architecture © 2019 VIZUS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1914년 7월에 발발한 세계1차대전으로 9월 문을 닫았고, 이후 1915년 전쟁으로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세계대전에 발발하기 직전, 반 데 벨데는 벨기에로 돌아갔으며 이때 반 데 벨데가 학교장으로 있던 바이마르 미술 공예 학교의 교장직을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넘겨줍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학교 이름을 국립 바우하우스(Das Staaliches Bauhaus, 직역하면 건축을 위한 집)으로 정하고 개교하였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지만, 질문을 해봅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극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바우하우스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