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 2019

조르주 페렉의 『실종(La Disparition)』

조르주 페렉, 프랑스, 1936. 실종(La Disparition), 1969. 소설, 12.5cm×21.5cm. ©EDITION ORIGINALE

8월 30일은 실종의 날(세계 강제실종 희생자의 날, International Day of the Victims of Enforced Disappearances)입니다. 강제실종이란 국가기관 혹은 국가의 역할을 자임하는 단체에 의해 체포, 구금 또는 납치되어 '실종'되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국가에 의한 실종'입니다. 강제실종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10년 '강제실종 협약'이 발효되었습니다. 살릴 셰티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이번 협약 발효는 피해자들과 가족, 그리고 지역사회에 엄청난 아픔을 가져다 준 강제실종을 중단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걸음"이라며 환영했으나, 아직도 세계 등지에서 강제실종에 의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강제실종은 실종된 사람은 물론이고 그의 행방을 모른 채 괴로워하는 가족과 사회에도 여파를 남깁니다. 강제실종이 또다른 강제실종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습니다. 『실종(La Disparition)』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이었던 부모님을 잃은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페렉이 실종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실종자는 흥미롭게도 사람이 아니라 알파벳 철자 중 하나입니다.

실종(La Disparition), 조르주 페렉, 1969

1969년 첫 발간한 조르주 페렉의 『실종』은 실종된 주인공의 행방을 쫓는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실종보다 눈에 띄는 점은 알파벳 'e'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어 모음에서 'e'가 사용되는 비율을 감안했을 때, 해당 철자의 부재와 함께 쓰여진 300여 페이지 분량의 이야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의 실종으로부터 3년 후, 페렉은 『돌아오는 사람들(Les Revenentes)』에서 그들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이번에 페렉은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음이 쓰여야 할 자리에 몽땅 'e'를 위치시켜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목인 'Les Revenentes'에서도 'e'만을 사용하기 위해 페렉이 의도적으로 단어의 철자를 바꾸어 썼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페렉이 『실종』에서 사용했던, 특정문자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글을 쓰는 기법은 리포그램(lipogramme)이라고 합니다. ‘배제된 글씨’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λειπογράμματος’(leipogrammatos)를 어원으로 하는 리포그램은, 통제된 글쓰기를 매개로 하는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페렉의 글쓰기와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잠재 문학 작업실'이라는 뜻의 울리포(OuLiPo)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울리포 그룹은 레몽 크노를 중심으로 마르셀 뒤샹, 이탈로 칼비노와 같은 작가, 화가, 수학자 등의 구성원들이 모인 1960년대 실험 문학 그룹입니다. 울리포 그룹의 중심 개념은 '형식적 제약'으로, 이들은 문학적 상상력이 의도적인 제약을 통해 극대화되고 이로 인해 창의적인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울리포 그룹은 당시 문학계가 젖어 있었던, 창작에 대한 무한한 자유가 작품의 독창성을 보장한다는 초현실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작가로 하여금 엄격한 규칙을 정립한 후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그에 따라 글쓰기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가장 새롭고 자유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철자를 해체하고 순서를 바꾸는 '아나그램(anagramme)'이나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에서부터 읽어도 같은 '팔랭드롬(palindrome)' 등의 글쓰기 방식을 시도하는 것을 울리포 그룹은 주저하지 않았고, 페렉이 'e'를 제외한 글쓰기를 통해 완성한 리포그램인 『실종』 또한 이러한 실험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후 페렉은 『인생 사용법(La Vie, mode d'emploi, 1978)』에서 가상의 거리에 있는 아파트 입주자들의 이야기를 99개의 장에 걸쳐 만들어냅니다. 한 장에 하나의 방을 거쳐가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체스 말을 파리 특정 지역의 평면도 위에 움직인 기록을 재구성한 결과입니다. 퍼즐과 게임을 좋아했던 페렉은 체스의 규칙을 경유하여 인물과 사건들을 나열해나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기도, 때로 예측 불가능하게 연결되기도 합니다.

11 Rue Simon-Crubellier의 평면도 위 나이트 말이 이동한 궤적
『인생 사용법』의 배경이 되는 Steinbergian apartment의 챕터 구성 표(

이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교적 간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이 이끌어내는 인식과 사유의 변화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언어의 체계를 사소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언어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는 일상의 언어를 주 재료로 견고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견고함을 뚫고 현실 세계에 잠재적 이미지가 출현하게 되는 가능성은 일정한 제약을 통한 일상 언어의 자유로움을 파기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강력한 제약에 속박되는 순간에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인식과 사유의 역설과, 이에 따라 의식과 세계의 질서 아래 잠자고 있던 무의식의 이미지가 올라올 수 있는 가능성을 울리포 그룹의 문학 실험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레몽 크노의 『백만시(Cent mille milliards de poèmes)』
레몽 크노의 『문체의 연습(Exercices de style)』

전후 방황하는 젊은이들로 가득찬 프랑스 소비사회를 묘사한 페렉의 초기작 『사물들(Les Choses, 1965)』에 열광했던 독자들은 이와 비슷한 후속작을 기대했으나 페렉의 글쓰기 방식은 그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습니다. 페렉은 "작가로서의 내 욕심은, 이 시대 가능한 모든 문학 장르를 두루 써보는 것이고, 두 번 다시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독자들의 불만스러운 의문에 답했습니다. 페렉은 자신을 농부에 비유하며, 본인에게 있어 글쓰기란 '네 가지 밭에 각기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작업'이고 '네 가지 밭'에는 '사회학적 글쓰기', '로마네스크적 글쓰기', '유희적 글쓰기', '자서전적 글쓰기'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매번 완벽하게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을 감행한 페렉에게도 그가 변하지 않고 간직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년시절 겪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페렉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 자원입대하여 전사했고, 어머니는 페렉을 적십자사에 위탁한 뒤 나치에게 끌려가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부모님이 실종된 순간, 어린 페렉은 세계로부터 실종된 자가 되었습니다.

페렉은 밀물처럼 찾아오는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글쓰기를 통한 기억하기를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페렉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글쓰기를 통해 소환되며 그가 작가로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페렉은 왜 죽음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았으며, 그 기억이 어떻게 문학적 실험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요? 실종된 'e'와 부모님을 유령에 빗대어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는 그가 내세운 유령론(hauntology)에서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존재론에 의해 쫓겨난 것들에 주목합니다. 현전하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은폐하고 주변부로 내모는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유령의 출현을 촉발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쫓겨난 유령은 미지의 장소에서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떠돌고 있습니다. 현전하는 존재의 근원적인 부분을 은폐함으로부터 생겨났기에 어떻게든 유령은 존재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령이란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것은 무의미하며,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되돌아올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데리다는 쫒겨난 '유령들'을 '유령(spectre)', '망령(revenant-ghost)', '환영(phantom)'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들어 설명합니다. 망령은 시각적 대상이 부재하는 자리에 그것의 결여분으로 발생하는 환상(fantasy)으로 일컬어집니다. 부모님의 실종은 페렉에게 지울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 'e'의 실종이라는 창작물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페렉의 『실종』을 부모님의 실종으로 인한 좌절의 산물인 망령으로 보아야 할까요? 실종자인 페렉은 실종된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서 페렉이 'e'의 실종을 통해 부모님의 실종과, 나아가 세계대전이라는 상황 속 변두리로 밀려나 제거당한 유대인들의 실종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e'가 알파벳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 철자인 것처럼, 유년시절의 페렉에게 부모님과 유대인이라는 민족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리포그램의 형식을 빌린 페렉의 글쓰기는 쫓겨난 존재에게 시각적인 살과 피를 부여하여 유령으로서의 그들을 초대합니다. 페렉은 분명 'e'들을 실종시켜 알 수 없는 장소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실종』에서가 아니라 'e'들이 지면을 지배적으로 수놓으며 귀환하는 모습을 펴낸 후속작 『돌아오는 사람들』에서야말로 페렉의 진정한 바람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유령은 어떤 존재의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이질성'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창작의 '자유'에 있어서도 그것의 반대 개념인 '구속'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예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형식과 내용의 완전한 파괴를 통해 자유로움에 도달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세계로부터의 실종자였던 페렉은 매번 규칙에 따라 움직였고, 자신의 세계에서 오직 한 가지, 'e'만을 실종시켰습니다. 창작에 있어서 자유로움은 과연 어디에 있을지, 페렉과 울리포 그룹의 '제약'을 통한 글쓰기를 관찰하며 질문할 수 있게 됩니다.

페렉과 울리포 그룹의 볼로냐에서의 만남
『실종(La Disparition)』을 오마주한 <G org s P r c >, 출처: 위키피디아